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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 전문 배우’ 유동근 “18년 통치한 태종·박정희, 맹수 같지만 인간적인…” - 조선일보

배우 유동근씨.
배우 유동근씨가 자리에 앉았을 때 나는 말을 꺼냈다.
“오늘 유 선생을 모신 것은 대선(大選)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를 만나는 이유를 현장에서 알려준 셈이다. 그는 허허허~ 기가 찬다는 웃음을 터뜨렸으나, 나는 말을 이어갔다.
-’왕 전문 배우'로 알려져 있는데, 실제 왕을 비롯한 권력자 배역을 많이 맡으셨지요?
“여섯 번쯤 되죠. 어떻게 하다보니까, 태조, 태종, 세조, 연산군, 흥선대원군‥”
-어떻게 해야 최고 권력자의 배역을 맡을 수 있지요, 물론 감독의 마음이겠지만요
“제 대표적인 작품이 ‘용의 눈물’이었으니까, 이방원(태종)을 하기 전에 이미 연산군, 수양대군을 통해 사극의 의상과 수염 분장과는 친숙했어요. 저를 이렇게 만들어준 분은 돌아가신 ‘용의 눈물’ 연출자 김재형 감독님이지요. 그때는 바지저고리를 입고 수염도 붙이게 하고 당신 옆에서 자게 했어요. 다른 사람들은 다 다른 방에서 자는데, 감독님은 ‘아무 소리 하지 말고 내 시키는 대로 해라’고 했어요. 그런 과거가 있었어요·‥. 그러다가 제가 ‘애인’(1996년)이라는 드라마를 하게 됐어요.”
-제 질문은 여러 사극 배우들이 있는데 왜 유 선생은 왕의 역할만 맡느냐는 거죠. 왕의 얼굴이 따로 있는 겁니까?
“그 말씀을 드리려는 것인데·‥, 멜로물인 ‘애인’ 드라마가 엄청난 인기를 끌었지요.”
-상대 여배우가 황신혜였지요?
“황신혜 씨였지요. 당시 그 드라마 촬영 현장에 김재형 감독님이 (저를 섭외하기 위해) 다섯 번 찾아오셨어요. 그게 ‘용의 눈물’의 시초였어요. 그때만 해도 대하드라마 시청률은 5% 정도였고 멜로 시청률은 좋으니, 어린 마음에 사극을 하고 싶지 않았지요, ‘애인’의 마지막 촬영 날 김재형 감독님이 저를 1시간 이상 기다리고 있다는 말을 들었어요. 그 순간 제 마음이 무너지더라고요. ‘알겠습니다, 작품을 하겠습니다’고 대답했지요.”
-김재형 감독이 ‘동근아, 석양처럼 불태우고 싶다’고 말했다는 순간 아닌가요?
“그때 마침 (‘애인’ 드라마) 석양 장면을 찍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어요. 김재형 감독님이 담배를 피우면서 ‘내가 얼마나 살겠나. 이 역할은 네가 해야겠다’고 했어요. 그렇게 시작한 드라마(용의 눈물)가 엄청났던 거죠. 어느 인터뷰 자리에서 감독님이 ‘왕의 옷을 가장 잘 소화할 수 있는 사람이 유동근이었기 때문에 캐스팅했다’고 말씀했어요. 상투를 틀면 그 사람 얼굴 90% 이상이 관상학적으로 나타나요. 저는 희한하게 상투 틀고 수염 붙이고 왕의 의상을 걸치면 제가 봐도 왕의 모습이에요. 정말 왕이에요.”
-왕의 얼굴이란 어떤 것인가요? 근엄하다, 카리스마가 있다, 아니면 뭐가 있을 게 아닙니까, 멋있게 보인다든가?
“글쎄요, 첫 번째로는 수염과 어울릴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아요.”
-그래서 지금 수염을 기르고 있나요?
“사극(史劇)은 보통 1년 6개월~2년 찍어요. 일주일 4~5일은 니스를 바르고 살아야 해요. 왕의 분장을 하는데 1시간 정도 걸려요. 한 올 한 올 핀셋으로 붙이거든요. 나중에 니스를 바르면 마치 본드 냄새 같아 그냥 잠이 들어요. 분장을 지을 때는 석유로 지웁니다. 니스와 석유로 턱 아래쪽은 탈색이 돼요. 피부층이 얇아집니다. 그래서 면도를 자주 안 하는 편이죠.”
-일종의 직업병이겠군요.
“직업병이죠. 여자분들은 무거운 트레머리를 쓰고 하루 종일 촬영하니 정수리가 빠져요.”
-본인이 왕의 모습이라고 했지만, 실제 1981년 드라마 데뷔했을 때는 자객· 문지기 역할이더군요. 왕의 얼굴로 문지기도 하는 겁니까?
“그때는 왕의 얼굴이 아니었지요. TBC의 23기생으로 들어가 한 달쯤 돼서 방송 통폐합이 돼 연기자들은 배역이 없어졌어요. 저는 교육을 못 받고, 연출부· 제작부에서 막일을 3년 했어요. 필름을 나르고 밥 나르고 방 잡아야 하고, 돈 계산해야 하니 전대를 차고 다녔어요. 이렇게 심부름하면서 남들의 연기를 보게 됐어요. 나도 하고 싶은데 불만을 나타내지 못하고‥.”

-유 선생의 왕은 어떤 왕인가요?
“운이 좋게도 제 배역은 에너지 폭이 넓은 왕이었지요. 분노도 있고 인간적 슬픔도 있고 영역대가 넓었어요. 특히 음성이나 표정, 눈에서는 상당히 온화하면서 맹수처럼 사나운 결이 나와야지요.”
-온화함과 맹수적인 것이 결합돼있는 게 최고 권력자의 모습이었다?
“그렇지요. 권력은 잔인해야 되니까요. 잔인함 속에‥, 결국 인간이기 때문에 회한이 있는 거죠. 태종 이방원은 처남인 민무기·민무질 등을 다 없애버렸으니까. 결국 이방원은 창업에 성공했고 수성(守城)에도 성공한 18년의 통치자로‥. 그 캐릭터는 배우로서 해볼 만한 것이지요. 빗대어 보면 박정희 대통령은 18년 통치에 산업화를 이루는 데까지만 성공했지만‥·”
-태종과 박정희가 대비되지요?
“산업화를 이루는 데까지 그친 것은 박정희의 운명이었고‥, DJ는 창업도 했고 수성에도 성공했죠. 노무현 대통령을 앉혀놓았으니까. 그 이후로 국민은 뭔가 그런 권력을 찾고 바라고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닌가요. 잔인한 권력이 됐든 편안한 권력이 됐든 어떻든 권력이 국민에게 올곧게 서비스를 할 수 있는‥.”
-20년 전 인터뷰하면서 놀랐던 것은 선생께서 독서를 안 한다고 했어요. 명색이 유명 탤런트가 기자에게 그런 말 하는 게 솔직할 순 있지만 남사스러울 수도 있는데, 실제 그렇습니까?
“그 기사를 보고 선배분들도 왜 그런 얘기를 했느냐고 했어요. 당시 인터뷰할 때 ‘제가 요즘 어떤 책을 보고 있다’는 식의 말을 못 하겠더라구요. 저희는 항상 책과 지내고 지낼 수밖에 없어요.”
-어디 가서 겉멋 든 친구들은 마음에 안 들겠군요?
“그냥 봐주고 있을 뿐이죠. 젊었을 때도 저는 그런 스타일이 아니었어요. 일부러 예술적인 행위를 싫어하는 사람이었고, 인기 드라마 끝나는 자리에서도 기분이 업 된 적이 없어요. ‘아, 끝났구나. 또 백수이구나’하며 집에 들어가는 거예요. 자기가 하는 배우 행위는 카메라 앞에서 끝을 내야 한다고 후배들에게 말합니다. 집에 들어가면 거기에 맞게끔 그 규범에 맞게끔 하고, 배역이 오면 또 인물을 창조해내는 것이죠.”
-연예인들이 정치에 앞장서 발언이나 행위를 하는 게 흔한 풍경이 됐고, 복잡한 사회 안에 대해서도 인기 있다는 이유로 발언을 하지요?
“그런 취향은 제게 맞지 않고, 가끔 봤을 때 좋은 모습은 아니라고 봐요. 우리 연예인들은 자기 영역에서 최선을 다해야지, 인기라는 것이 평생 간다는 법이 없어요. 작품을 할 때의 인기이지, 마치 자기 시계는 멈춰버리는 양 행동하는 것은 스스로 조심할 필요가 있죠.”
-언제 그걸 깨달았습니까?
“저는 처음부터 갖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시청률이 올라도 만끽해서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옹의 눈물’ 방영 당시 대선 기간과 맞물렸어요. 얼마 전 돌아가신 이한동 대표께서 당으로 불러서 가니 꽃다발을 주고‥, 제가 기자들에게 ‘입당으로 하러 온 게 아닙니다’고 말했어요. 겁이 없다고 할 수는 없고, 누가 그런 얘기를 할 수 있겠어요.”
-연예인 생활을 하면 정치권력에 대한 매력, 힘에 대한 매력을 느끼지 않나요. 과거 신성일 선생을 인터뷰하니 ‘남자라면 정치를 한번 해봐야지’하는 유혹을 받았다고 하더군요.
“신성일 선생님 시절에는 그런 욕망이 있을 수 있죠. 옛날에는 남자라면 검사·국회의원·조폭도 한번 해볼 만하다 했지만, 지금은 그런 세상이 아니거든요. 드라마가 뜨면 정치권이 연예인에게 프러포즈 하는데 하나의 구성에 불과한 거죠. 사회운동하는 사람, 대중문화인 몇 명씩으로‥. 이는 상 위에 놓는 반찬일 뿐이지요. 그 반찬 역할을 하려고‥, 아닌 말로 배지 주고 엄청난 권력을 준다면 한번 해볼 만하지요.”
-실제로는 대중스타가 우리 사회에서 영향력이 가장 세죠?
“영향력이 있죠.”
-어디 가도 대접받고?
‘그렇죠. 감사하게 생각하고 일상생활에 조심할 필요가 있다고 봐요.”
-연예인들 중에서 대접받고 이름이 알려진 것은 극히 소수지요. 95% 이상은 생활이 어렵다고 들었는데, 유 선생은 연기자협회 회장이었지 않습니까?
“연기자협회 회장이었고, 지금은 방송예술인총연합회 이사장이지요. 연예인 대부분은 대중매체에 항상 열외가 되지요. 방송하니까 먹고 살 만하다는 것은 눈앞에 보이는 시선이고, 실제 배우의 애환을 일반 대중이나 정치권은 잘 몰라요. 어떤 애환이 있는지, 결국 의식주와 연결이 돼 있어요. ‘생계형 연기자’로 치부하는 것은 실례예요. 가령 밤새도록 대기하고 있는데 ‘쪽대본’이 나왔을 때 자기 배역은 빠져있어요. 그 대본을 들고 귀가하는 연기자는 어떨까요, 집에는 처자식이 있는데, 그 밑그림, 아픔까지 주인공은 내다보고 살펴볼 줄 알아야 해요 "
-6개월 전 최불암씨는 ‘지도자들이 나라를 어떻게 이끌어가는지 국민들이 불안해한다. 명쾌하게 설명해줬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유 선생은 왕을 많이 해봤으니까..?
“최불암 선생은 그런 말씀이 어울릴 거예요. 제가 알고 있는 최불암이라는 배우는 독보적인 존재예요. 특히 아버지가 갖고 있는 품성의 자애로움‥, 토속적인 한국인 아버지의 멋과 맛은 단연 최고예요. 그분은 세상의 어른이기 때문에 한 말씀 주시는 것은 썩 어울려요. 저는 그 순서는 아닌 것 같아요. 단지 왕 역할을 많이 한 사람으로서, 저는 오히려 왕이 편한 세상이 왔으면 좋겠어요. 왕이 편하면 우리 국민도 편할 텐데‥.”
-요즘 왕이 그렇게 안 편한 모양이죠?
“많이 고생하시는 것 같아요. 편안하셨으면..”
-고생하는 것은 일을 많이 해서인가요? 아니면 쓸데없는 일을 많이 해서, 안 해도 될 일을 해서 그런 것 같습니까?
“글쎄요. 속상하시겠지요. 편안하셨으면 국민들도 편할 텐데.”
-전인화씨와 같이 사는데, 그분은 ‘왕비’이지 않습니까?
“예.”
-왕과 왕비가 같이 사는 집안은 어떻습니까?
“왕손 집안이죠, 하하하.”
-그 안에서는 실권이 누구한테 있습니까?
“왕비한테 있죠.”
-왕비한테 확실히 있습니까? 지금 청와대도 왕비한테 있는 겁니까?
“하하하. 최 기자님, 저는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전인화 씨와 결혼해 잘 됐어요. 또 우리 아이들이 태어나면서 잘 됐고, 어머님을 신혼 때부터 모시고 살았고, 아무래도 나이차가 있고 제게는 연기자 후배였고‥.”
-젊은 날 친구들과 여행 갔다가 음주운전 차량과 충돌해 얼굴뼈와 갈비뼈 상당수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었다고 들었어요?
“30대 후반이었지요. 온몸이 망가졌어요. 그때 치아가 다 털렸어요, 사람이 살려니까 양쪽 어금니만 남고 옥수수처럼 다‥, 통 틀니를 했어요. 녹화할 때면 양쪽 어금니를 조여야 했어요. 끝나면 잇몸이 다 찢어져서, 그럼에도 저는 비애스럽게 생각하지 않았어요. 사고 뒤로 저는 국어책 읽듯이 연습을 해서 구강구조를 단련시켰어요.”
-그 나이에 그 정도 사고가 나면 ‘내 생은 끝났다’고 여겼을텐데요.
“부모님 덕분인지 몰라도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았어요. 그 무렵 전인화 씨와 연극을 같이 했어요. 그때도 틀니였어요. 공연이 끝나면 피가 한웅큼 나왔어요. 전인화씨는 그걸 몰랐죠.”
-사고 자체도?
“몰랐어요. 그런 뒤 전인화씨가 ‘장희빈’ 드라마에 출연하게 됐는데, 저와 친한 김을동 선배가 전인화씨에게 ‘대사를 맞추려면 유동근과 해라’고 했어요. 그래서 전인화씨가 대본을 들고 집으로 찾아오면 대사를 맞춰줬어요. 그렇게 일 년을 보냈는데도 희한하게 자기 손도 안 잡으니, 전인화씨가 ‘오빠는 참 희한한 사람이야’고 했어요.”
-희한한 사람 맞기는 맞군요.
“잠잘 때는 틀니를 소독약에 담가두고 자요. 어느 날 자고 있는데 어디서 훌쩍훌쩍 울음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전인화씨가 대사를 맞추러 와서 틀니를 본 거예요. 내가 내색 않고 틀니를 끼고는 ‘대사를 맞추자. 아무 일도 아니니 괜찮아’라고 했어요. 그때 그 사람이 저를 가장 불쌍하게‥, 그래서 그동안 자기 손도 안 잡았구나 생각했겠지요.”
-결혼할 때 부인에 대한 고마움이 세월이 지나면 희석되지요. 영원한 것은 없으니 미안하고 고맙다는 생각은 이제는?
“제 성격인데, 한번 맺은 인간관계는 아주 오래 가요. 교유의 폭은 넓지 않아요.”
-우리는 20년 전에 보고 1년에 평균 한번 통화하는 사이지요.
“그때 인터뷰하고는 최 기자님이 기억에 남았어요. 조금도 배우를 불편하게 한다든지 기자 입장에서 연예인 대하듯 하지 않았어요”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