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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밖 10m까지” 43년차 배우 유동근, 발성법부터 다시 배우게 한 그 연극

작성자
kpaec
작성일
2023-01-13 23:55
조회
232
연극 ‘레드’로 30여년 만에 무대 복귀
천재화가 '마크 로스코'로 변신
엄청난 대사량·드라마 발성 고민
배우는 결국 성실함…끝날 때까지 배우 수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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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레드’를 통해 30여년 만에 무대로 돌아온 배우 유동근 [신시컴퍼니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붉은 그림이 가득 채워진 무대 위로 배우 유동근(67)이 걸어 나온다. 얼룩덜룩한 물감 자국이 지워지지 않은 셔츠를 입고, 붉게 물든 손을 한 화가의 모습으로. 객석으로 조금 더 가까이 나와 첫 대사를 한다. “뭐가 보이지?” 미국 추상 표현주의 화가 마크 로스코(1903~1970)가 그의 조수 켄을 처음 만나 건넨 질문이다.

마크 로스코를 무대로 데려온 연극 ‘레드’가 공연 중인 예술의전당에서 만난 유동근은 인터뷰를 시작하기도 전에 이렇게 말했다. 마치 마크 로스코처럼, 조금은 차갑게, 그러나 다그치듯, 대답을 재촉하듯, 짧은 말엔 운율을 담아, 쩌렁쩌렁하게 묻는다. “뭐가 보이지?”

“이놈의 ‘뭐가 보이지’가 사람을 환장하게 만들더라고요. 고민을 많이 했어요.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이 대사를 어떻게 해야 할까 싶더라고요. 잠을 자다가도 ‘뭐가 보이지’를 할 정도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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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때마다 “로스코와 접신하게 해주세요”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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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3주차에 접어든 유동근은 무대 아래에서도 마크 로스코였다. 빨간 물감이 툭툭 떨어진 흰 티셔츠를 입고 흐트러진 머리를 하고, 마크 로스코처럼 그의 세계 안에 집중한다. “작품을 오래 하다 보면 그 인물과 접신하게 될 때가 있어요. 공연 전엔 캄캄한 무대에 홀로 서서 오늘도 로스코와 접신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염원해요. 막연히 ‘오늘은 한 번 와주세요’ 하죠. 올 때도 있고 안 올 때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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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안에서 이성계부터 흥선대원군까지 조선왕조 500년을 관통하는 수많은 왕과 왕의 아버지를 연기한 유동근이 이번에 미국 추상 표현주의 화가 마크 로스코의 이야기를 담은 연극으로 관객과 만나고 있다. [신시컴퍼니 제공]
데뷔 43년차, TV 안에서 이성계부터 흥선대원군까지 조선왕조 500년을 세운 수많은 왕과 왕의 아버지를 연기한 유동근이 소극장 무대에서 관객과 만나고 있다. 연극은 마크 로스코와 그의 조수 켄이 꾸미는 2인극이다. 2011년 국내 초연, 올해로 여섯 번째 시즌을 맞았으나 유동근은 이번이 첫 출연이다.

작품은 유달리 대사가 많다. 생전 마크 로스코가 이토록 말이 많은 사람이었을까 싶을 정도다. 그는 “배우 입장에선 대사가 아주 많은 작품이라는 것이 어려운 부분이었다”고 말했다. “지문 없이, 대화로만 채워진 대본”은 유동근에게도 익숙하지 않았다. 때문에 연습도 남들보다 빨리 시작했다. “본격적인 연습을 시작하기 3주 전”부터 유동근의 로스코 ‘빙의’는 시작됐다.

“대사를 다 외울 수 있을까 걱정이 많았어요. 어딜 가든 ‘레드’에 미쳐 떠들어 외웠고, 대사를 다 외워도 허덕일 수 밖에 없었어요.” 대사마다 함축적 의미도 많기 때문이다. “훅 지나가는 짧은 한 마디에 로스코의 철학과 예민함, 섬뜩함을 만날 수 있어요. ‘니체 읽어봤나. 프로이트는 읽어봤겠지’ 라며 켄에게 건네는 대사가 있어요. 수염 붙이고 왕만 했다가 ‘와아 내가 프로이트와 니체를 이야기해?’ 싶은 마음도 들더라고요.”

워낙 어려운 대본이고, 철학적 메시지가 많아 유동근은 “조금 더 인간적이고 쉽게 다가서려 했다”고 말했다. “철학가, 예술가가 아닌 유동근이 해석한 로스코를 통해 긴장을 풀 수 있는 여백을 찾아 보여주고자 했어요.” 진지하고 날선 대화, 치고 받는 대사 속에서 때때로 확 풀어진 능청스러운 표정과 행동, 말투에 관객의 웃음이 터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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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가도 '연극배우' 못 붙일 듯" 고백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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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레드’를 통해 30여년 만에 무대로 돌아온 배우 유동근 [신시컴퍼니 제공]
극복해야 할 과제는 또 있었다. 드라마와는 전혀 다른 발성이었다. 유동근의 대사는 독특한 리듬감이 실려 랩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노래를 하는 것 같기도 하다.

“방송은 오디오가 있으니 5~10m까지 들리게 말할 필요가 없는데, 무대는 뒷좌석까지 소리를 꽂아야 해요. 그간 드라마 활동을 하며 잊어버린 발성을 되찾으려 발성 코치와 함께 호흡법부터 다시 익혔어요.”

1980년대 민중극단에서 전단지를 붙이며 연극계에 첫발을 디딘 이후 30여년 만에 다시 오른 무대였기에 부담도 더 컸다. 이미 43년째 한 길을 걸었지만, 왕도는 없었다. “로스코가 가진 어느 정도의 톤과 발성이 관객들과 유대감을 가질 수 있을지 고민하며 만든 결과물이에요.”

첫 공연 전에 “도망가고 싶은 마음”도 들었고, 무대에 오를 때마다 “실수도 한다”고 돌아본다. 유동근은 “연극은 예술성이 짙은 작업”이라며 “연극을 하는 지금도 평생 가야 연극배우라는 말은 붙일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한다. 오랜 시간 무대를 지켜온 사람들에 대한 존중과 존경이 크다.

“무대 위 배우의 놀이를 가볍게 여기기엔, 무대를 지켜온 제작자와 연극배우들의 열정이 너무나 커요. 그 분들이 가진 무대에 대한 존엄성을 함부로 대해선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래서 저를 더 정중하게 운행하고 있고요.” 베테랑 배우이지만, 그의 오늘은 여전히 ‘배우 수업’ 중이다.

“배우는 결국 바닥에서부터 집을 만들어가는 성실함의 작업이에요. 막이 내릴 때까지도 ‘레드’를 배워갈 뿐이죠. 지금도 배우 수업을 하고 있어요.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지만, 무대가 끝나고 내 안의 로스코를 완전히 소각하는 것까지가 나의 배우 수업이에요.”

sh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