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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칠고 빠른 유동근 VS 차갑고 날카로운 정보석
“연극에 담긴 신·구세대의 충돌… 결국 모든 인생에 대한 이야기”

“한 배역을 나눠 맡았는데 온도 차이가 있다. 정보석 배우의 부드럽고 멋진 연기가 부럽기도 했지만 나만의 해석, 좀 더 인간적인 로스코로 다가가고 싶었다.”(유동근)
“형님이 연습하는 것을 일부러 보지 않다가 오늘 처음 봤는데 깜짝 놀랐다. 역시 명불허전이다. 나는 로스코를 좀 더 치밀하고 빈틈없는 인물로 표현하고 있다.”(정보석)
배우 유동근(66)과 정보석(61)은 미국 추상표현주의를 대표하는 화가 마크 로스코(1903~1970)와 동시에 사랑에 빠져 있다. 두 배우는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공연 중인 연극 ‘레드(Red)’에서 로스코를 번갈아 연기하고 있다. 일종의 삼각관계. 경쟁 심리도 느껴진다.
‘레드’는 로스코와 가상 인물인 켄의 대화로 구성된 2인극이다. 1958년 로스코가 고급 레스토랑으로부터 거액을 받고 빨간 벽화 연작을 그리고 있는 작업실로 관객을 데려간다. 28일 만난 유동근·정보석은 “훌륭한 연극은 배우에게 고통과 행복을 함께 준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고 했다.
두 배우가 걸어온 길은 다르다. 드라마 ‘용의 눈물’ ‘정도전’을 거치며 KBS 연기대상을 최다(4회) 수상한 유동근은 강렬한 카리스마로 기억된다. 단정한 이미지의 정보석은 1980년대 청춘 스타였지만 40대 후반부터는 시트콤에 나오고 악역도 맡으며 연기 스펙트럼을 넓혀왔다.

1980년대 민중극단에서 데뷔한 유동근은 30여 년 만의 연극 복귀 무대라 3주 먼저 연습을 시작했다. 그는 “2019년 정보석이 공연한 ‘레드’를 보고 로스코의 열정과 에너지에 매료돼 용기를 냈다”며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로스코를 관객이 얼마나 공감할지 두려웠지만 연습하는 과정에서 어떤 확신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2015년과 2019년에 그 인물을 경험한 정보석은 “다시 돌아와 보니 나만 ‘경력자’라 책임감이 크지만 익숙하고 반가운 공간”이라며 “내게 ‘이루지 못한 짝사랑’ 같은 이 연극을 새로운 배우들과 다른 빛깔로 펼쳐보이고 있다”고 했다.

무대에는 물감과 양동이, 크고 작은 붓이 즐비하다. 그림들은 조명을 받으면 생명력을 얻은 듯 눈길을 잡아끈다. 그런데 로스코는 조수 켄(강승호·연준석)에게 물감을 섞고 캔버스 틀을 짜는 단순한 일만 시킨다. 켄은 변화를 거부하는 로스코와 그의 작품 세계를 비판하며 거침없이 질문한다. 치열한 논쟁과 외로운 침묵이 엎치락뒤치락한다.
유동근의 로스코가 거칠고 빠르다면, 정보석의 로스코는 차갑고 날카롭다. ‘레드’는 피카소의 입체파를 몰아낸 로스코의 추상표현주의가 앤디 워홀의 팝아트로 위기를 맞듯이, 옛것이 새것에 정복당하는 세상의 순환을 담고 있다. 두 배우는 “구세대와 신세대의 충돌은 인생에 대한 보편적 이야기로 확장된다”고 했다.
‘레드’는 2010년 미국 토니상에서 작품상 등 6관왕을 차지했다. 로스코는 작업실에서 LP판으로 클래식을 듣는다. 관객은 이 이야기에 저류처럼 흐르는 모차르트와 바흐, 슈베르트를 감상하게 된다. 1000년 뒤에도 존재할 불멸의 곡들이다.

조선일보 , 박돈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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